인양사로고

  • 도량소개
  • 혜일스님
  • 탑이야기
  • 신행활동
  • 배움터
  • 참여마당
  • 탑이야기
  • 동삼층석탑
  • 출토유물
  • 불사리 탑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 하층기단은 4매의 석재로 조립되었는데, 지대석과 면석이 한 돌로 구성되었다.면석에는 3기의 탱주와 우주가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5개 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면에는 호각형 2단의 기단 받침을 조출해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 기단 역시 4매의 석재로 조립되었으며 면석 에는 2기의 탱주와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높직한 초층 탑신받침이 마련되어있다.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1층 탑신석이 2·3층에 비해 높게 조성되었고, 옥개석과 더불어 알맞은 체감비를 보이고 있어 안정적인 자태를 보이고 있다.매 층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 층 각형 5단의 옥개석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대가 조출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날렵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처마의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 1965년 해체·수리되었으며, 3층 탑신의 중앙에서 일변 16.7cm, 깊이 13.6cm의 방형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사리공의 내부에서 청동으로 제작된 잔형(盞形)의 사리용기와 난백색의 사리 7과가 봉안된 사리병과 향편(香片) 및 작은 유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석탑은 3층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기단과 탑신의 균형이 조화를 이루어 고준(高峻)한 느낌과 당당함을 주고 있다. 아울러 석재의 가공 역시 정교하고 치밀한 수법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확립된 정형기의 양식을 모범으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형태나 석재의 조합방식이 석가탑과 너무나 유사하여 석가탑을 본받아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몇 가지 면에서 석가탑보다 더 옛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탑에 비해 더 크고, 당당한 2중 기단, 더 높고 무게감 있는 1층 몸돌, 상승감이 더 해 보이는 지붕돌 등에 의해 더 장대한 느낌을 준다는 점, 그리고 사리공의 위치가 석가탑의 경우 2층 몸돌에 있는 것에 반해, 동탑은 감은사, 고선사탑 등 8세기에 제작된 탑들과 같이 3층 몸돌에 사리공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 술정리동삼층석탑이 갖는 의의
    8세기 중반에 건립된 석탑들의 대부분은 경주를 중심으로 거의 한 지역에만 집중하여 건립되어 있는데 반해, 청도 봉기동삼층석탑은 수도인 경주 에서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는 일예로 주목된다. 이처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확립된 정형기 석탑의 양식이 바로 창녕에서 보이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지닌 정치사회적 중요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창녕은 본래 가야의 영토로서 108년(파사왕 29)에 신라에 복속된 이래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 중요시 되었던 지역이다. 때문에 555년(진흥왕 16)에 하주(下州)씨가 설치되었고, 561년(진흥왕 22)에는 진흥왕척경비가 건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 산재한 고분군과 더불어 이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은 이 지역이 신라시대의 군사·문화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뒷 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경주에서 확립된 석탑양식이 빠른 시간 내에 이 지역으로 전파됨은 당시 창녕이 지녔던 정치·사회·군사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술정리동삼층석탑은 당시의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하는 소중한 문화재이며, 전통성있는 모습의 가람으로써의 면모를 일신시켜 창녕군의 문화를 재정립, 내회에 선양하고, 문화관광자원으로써 활용가치 또한 매우 높다.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구조
  • 맨위로